원출처: https://m.blog.naver.com/minsu977/221105718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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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이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서 한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한국과 북한은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시내 건물들은 거의 폭격당해 뼈대만 남았고 걸핏하면 학살사건이 발생해 약 200만 이상이 사망하였으며 경제는 완전히 박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문화재 대다수는 우리 국군과 미군에 의해 파괴된 것들이 많았다. 전쟁 당시 전국에는 수많은 사찰들이 있었는데 1951년 1.4 후퇴 당시 미군이 이 사찰들에 빨치산들이 머무를 수 있다고 판단해 모두 폭격하거나 방화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70개 이상의 사찰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하거나 피해를 입었으며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불상과 탱화 등도 모두 불타버렸다. 정작 북한군이나 중공군은 사찰에 거의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이 포스팅은 6.25 전쟁 당시 파괴되었거나 훼손된 문화재를 알리려는 기획 하에 작성되었으며 여백이 부족해서 피해를 입은 모든 문화재를 다 넣지 못한 점 양해해주길 바란다.
1. 숭례문
6.25 전쟁 때 서울은 평양과 더불어 폭격대상 1호였다. 그러나 천만다행이도 숭례문은 폭격대상에서 제외되어 불타없어지는 건 면했다. 문제는 서울에서 총격전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이었고 이로인해 숭례문은 총알과 포탄 세례를 무수히 받아 여장과, 성벽, 그리고 기와지붕 등이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진 현판 일부도 떨어져버렸다.
숭례문이 계속 포탄세례를 받아 기와지붕도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하자 무너져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붕 사이에 나무기둥을 끼웠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결국 종전 후 숭례문은 곧바로 보수되었지만 그래도 훼손이 멈추지 않자 결국 1962년에 크게 해체, 복원되었다.
2. 화장사 내 유물
화장사는 북한 개성시에 있었던 사찰인데 6.25 전쟁 이전에 화장사에는 국보급 탱화와 불상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게다가 고려시대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공민왕의 어진도 함께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공민왕의 어진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언급되어 있어서 진품일 가능성이 컸으며 따라서 그 가치도 매우 컸다.
<"하니, 전교하였다.
"아뢴 뜻은 알았다. 그렇다면 내일 삼공을 불러 종부시 제조와 모여 의논한 다음 화장사에 있는 공민왕의 영정이라는 것을 모셔오라.">
- <조선왕조실록>; 중종 35년 10월 10일
그러나 이 귀중한 유물들은 6.25 전쟁 때 화장사가 폭격당하면서 모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3. 보신각
보신각은 시간, 통행유무, 화재경보 등을 종소리로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서울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종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서울 한복판에 설치되었다.
보신각의 종소리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멈췄지만 종각 자체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 보신각도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그 안에 있는 보신각종도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채 바닥에 나뒹구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4.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였던 진흥왕이 한강 하류를 고구려와 백제에게서 빼앗은 후 북한산 정상으로 올라가 세운 순수비이다. 이 순수비에는 진흥왕의 업적과 신라의 정책에 관한 정보들이 적혀있어서 당시 고대 한국사에 관한 사료가 부실했던 한국으로서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였다.
그러나 이 진흥왕 순수비도 6.25 전쟁의 영향으로 순수비 뒷면에 수많은 총탄자국이 생기고 말았다. 전쟁 도중에 힘들게 북한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비석에 총탄을 갈겼다는 게 더 신기하다.
5.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고려 선종 시기 혹은 조선 세조 시기에 축성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은 그 전체 높이가 17.4m, 얼굴 크기는 2.4m에 달하는 초대형 석불이며 거대한 천연 암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석불도 6.25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비록 파괴당하는 건 면했지만 얼굴 부분에 집중적으로 총알세례를 받아 석불의 얼굴을 마치 곰보같은 인상으로 만들어버렸다.
6. 경모궁
경모궁(景慕宮)은 본래 창경궁의 부속 후원으로 함춘원이라 불렸으며 매우 신성시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영조 40년(1764)에 사도세자의 신위가 이곳으로 옮겨짐으로서 함춘원은 사도세자의 사당으로 변했고 정조 때 경모궁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때 정조는